12세기 무슬림 지리학자 이드리시의 지도에 신라라고 표기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보면 처용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눈이 크고 코가 오똑하며 누가 보더라도 외지인에 틀림없는 처용을 두고 그 동안 아립인일 가능성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그 가능성은 무엇보다 당시 통일신라기에 배를 타고 신라의 개운포(지금의 울산항)까지 올 수 있는 해상세력은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아랍 상인일 수밖에 없다는 상황론에 근거한다.
처용이 등장하는 9세기경 동아시아 해상교역은 중국 동해안 양주를 중심으로 북쪽은 신라 해상세력이 장악하였고, 그 남쪽은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의 활동무대였다. 심지어 양주에는 신라인들이 모여 사는 신라방과 아랍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번방이 한도시에 나란히 존재함으로써 두 민족 사이의 교역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저술된 아랍 지리서 <왕국과 도로 총람>에 의하면 아랍인들은 자연환경이 뛰어나고 금이 많이 나는 신라를 동경하여 많은 아랍인들이 한반도로 건너가 영구 정착했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그밖에도 9~15세기의 17명의 이슬람 학자들이 쓴 20편의 책에서 아랍인과 신라인들의 빈번한 접촉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신라인과 아랍인들의 접촉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국제도시 당나라의 장안 덕분이다. 그당시 세계 문명의 집산지이며 아시아 정치의 중심지인 장아은 이슬람 제국의 사절이 빈번히 내왕했고, 무슬림 상인들에 의해 아랍, 서역 물품들이 대량 유입되었다.
신라는 매년 1회 이상 사절단을 장안에 파견했고, 703~748년에는 46회에 달하는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해 당 조정의 각종 행사에 참여했다. 아랍 역시 651~798년까지 최소 37회 이상의 아랍 사절단을 장안에 당도했다고 한다. <일본서기>에는 장안의 신년하례에 신라,일본 이외에도 아랍 사절의 참석을 전하고 있어 당 조정에서의 신라-이슬람 제국 간의 접촉을 짐작케 했다.
문화면에서도 중국에서 활동한 신라 불교승들이 성지순례를 위해 인도를 내왕하면서 이슬람화되었던 서역 및 아라비아까지 진출하였다. 9세기경 당에 유학갔던 일본 승려 엔닌은 10년간 체류하면서 수 많은 신라승을 만났다고 적고 있고, 당나라 승려 의정은 인도와 서역 기행을 7명의 신라 구도승의 전기를 담고 있다.
서역기행의 대표적인 신라승인 혜초는 인도에서의 순례를 마치고 귀로에 이란, 아라비아 및 서역 일대를 거쳐 727년에 장안에 당도했다. 특히 일부 불교 승려들은 해로를 통한 인도 순례시, 남방 해상권을 장악했던 무슬림 상인들의 교역선을 이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불교승과 무슬림들의 종교적 접촉을 시사한다.
당시 중국 동남부 도시에는 중국 당국에 의해 아랍-페르시아 출신의 무슬림들을 위한 자치 공동체가 설치되었다. 번방이라고 불리는 그들만의 거주 공간에서 무슬림들은 종교적 자유와 행정적 자치를 누렸고, "까디"라는 행정책임자와 "쉐이크"라는 종교지도자를 선출하여 이슬람법과 고유의 관습을 지켜갔다.
876년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때 중국 동남부 해안지대에서만 무려 10만 명 이상의 외국인이 살상되었는데 당시 그곳에 정착해 있던 외국인들의 다수가 아랍, 페르시아 상인들이었기에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름을 바꾸고 중국관습을 받아들임으로써 중국화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일부 사람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인근 인도차이나 반도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이슬람 세력이 신라로 유입되지 않았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일부 세력중에 처용이 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려 현종 10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대식국(아랍의 한자식 표현)에서 열라자등 100명이 와서왕을 만나 토산품을 바치니 왕이 그들을 극진하게 대접하게 하였다. 또 그들이 돌아갈 때 금,은, 옷감등을 선물로 주었다. 이해 다음해인 1025년에도 "대식이라는 오랑캐 나라에서 하산과 라자를 중심으로 100명이 와서 토산품을 바쳤다."라는 기록이 있고, 1047년에도 아랍상단 100명이 고려를 찾아와 토산품을 바쳤다고 한다.
이 기록을 보아 당시 아랍인들이 단순히 고려를 우연히 온게 아니라 그 이전부터 빈번한 왕래가 있었으며 그 규모도 100명에 이를만큼 상당했다는 점이다. 당시 교역은 국가와 국가간의 공교역이 존재했고 개인간의 사교역은 밀교역으로 금지되었기에 아랍인들은 오래전부터 고려시장에서 자세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슬람계 주민들이 본격적으로 고려로 정착하게 된 것은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고려말이다. 원나라 간섭하에 있던 고려는 무슬림의 대량 유입과 이슬람 문화의 전래가 두드러졌다. 중앙아시아 위구르-터키계로 추정되는 무슬림들은 몽고의 고려 침공시 몽고군의 일원으로서 후일 고려가 원의 준식민지 상태에 처해졌을때, 몽고 관리, 역관, 서기, 시종무관등의 직책을 가진 지배세력으로써 한반도에 유입,정착하였다. 그들은 고려 조정의 벼슬을 얻거나 몽고 공주의 후원을 얻어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점차 고려 여인과의 혼인을 통해 동화되었다.
고려에 거주하던 희화인들은 몽골의 비호를 받아 왕실과 특수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들은 실크로드를 통해 체득한 국제경제에 대한 경험과 정보를 바탕으로 고려사쇠에 기여했으며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다. 일한 제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라시드 알 딘이 저술한 <종합사>나 오스만 제국의 역사학자 겸 지리학자였던 알리 아크바르가 쓴 <키타이나메>에도 고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일제시대 사학자인 이능화가 쓴 <조선불교통사>에 따르면 이들 아랍집단이 고려 개성에 예궁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예궁은 이슬람 사원 모스크를 말하는 곳인데 이들 집단들은 경제적은 물론 사회적 종교적으로 잘 보존하며 개성 및 인근 근처에 자치공동체를 건설하고 이슬람 성원을 건설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슬람 집단은 조선에 넘어가면서 점차 쇠퇴해갔다. 1427년 세종은 이슬람 집단이 누리던 종교적 자치권을 금지하고 이들을 조선인화하였다. 이로써 조선속의 아랍인들은 급속하게 동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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